집필자 : 차경애(한국YWCA연합회 명예연합위원), 배정미(한국YWCA연합회 실무활동가)

저소득층 근로여성 위한 직업훈련과 근로 환경 개선 위한 활동 시작하다

1960년대 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 정책을 펴면서 막대한 자본을 투여해 중화학 공업 중심의 경제체제를 구축했고, 저임금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한 저곡가 정책을 펼쳤다. 이에 따라 막대한 인구가 농촌에서 도시로 유입되었고, 대표적인 저소득·저학력·저숙련 근로자인 여성들은 취업이 되더라도 남성보조역에 그친 비공식적 노동으로 간주돼 근로기준법이나 차별금지법 등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저임금으로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처지였다.

▲ 여성 노동자 인권운동 : 여성 근로자들과 함께 한 YWCA 활동

YWCA는 1970년대 이후 근로여성과 일반 저소득층 여성, 소외당한 여성들에게 직업기술 및 생활기술 교육을 본격적으로 실시하는 한편, 여성 근로자들을 위한 남녀차별의 실태를 알리고 제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1971년 당시 전국 지역YWCA의 직업기술교육을 보면 11개 지역YWCA에서 34개의 직업여성 클럽과 407명의 회원, 5개의 공장녀 클럽에 135명의 회원이 등록되어 있었다. 직업기술 교육반은 타자반 1개(25명), 편물반 29개(187명), 양재반 43개(749명), 미용반 20개(548명), 여차장반 10개(370명), 가정부 훈련반 3개(63명), 손편물반 50개(433명), 한국재봉반 19개(233명), 자수반 14개(120명), 전문요리반 1개(8명), 조화반 5개(50명), 주산반 14개(160명)등 총 209개 반에 2,946명이 직업교육을 받았다.

1974년 6월 한국YWCA연합회는 근로여성수기를 공모했다. 이 수기에 나타난 저소득층 여성근로자는 1960년∼1970년대 보릿고개 시절 동생들의 학비나 집안 살림을 돕던 14~24세까지의 미혼여성으로, 도시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소규모 서비스업이나 행상, 노점상, 건축 현장에서의 일용노동 등 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일반 직장여성이라 하더라도 가부장적인 사회분위기에 따라 직장여성들은 입사할 때 ‘결혼하면 퇴사한다’는 각서를 써야 했고, 책임자로 승진할 땐 남자 직원이 항의하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지던 때였다, 이에 한국YWCA는 “여자 은행원의 결혼퇴직 각서제 폐지”를 위한 운동을 전개했으며, 버스 안내원들의 실태조사를 통해 버스 안내원의 인권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

조선시대부터 상권을 형성해 온 을지로, 청계천 일대에는 수 십년간 작은 공장들이 모여 거대한 공장지대가 형성돼 수많은 노동자들의 일터가 되었다. 대학YWCA 회원들은 방학을 이용하여 청계천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야학을 개설해 기초학습 뿐만 아니라 노동자로서의 권리 등을 교육했다. 70년대 여성 노동자들은 야학을 통해 근로기준법 등의 노동권과 인권관련 지식을 쌓기 시작했고, 여성 노동자들이 차별과 불평등에 맞서서 싸우는 것을 보고 여성 의제에 눈을 뜨기 시작했던 시기여서 YH, 경남방직 등 마산 수출자유지역에서 일어난 여성 근로자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

근로여성을 위한 간담회

근로여성을 위한 간담회

▲ 무료직업안내소 운영

무료직업소개소 현판식

무료직업소개소 현판식

여성들에게 새로운 직업훈련을 시키고 취업의 기회와 불평등한 근로조건을 개선하는데 힘써 온 YWCA는 당시 여성들이 노동부 산하 직업안내소 보다는 무허가 직업안내소들의 속임수나 농간으로 엉뚱한 곳으로 소개되어가는 피해를 막기 위해 1984년 5월 16일 민간단체로는 처음으로 무료직업안내 사업을 시작하였다. 당시 무료직업안내소를 설치한 지역YWCA는 광주를 비롯한 18개 지역(군산, 대구, 대전, 마산, 목포, 부산, 서울, 인천, 전주, 조치원, 춘천, 수원, 제주, 진주, 의정부, 포항, 여수)이었다. 이들은 지방별로 사무직, 생산직, 서비스직, 전문직등의 취업상담과 구직, 구인 알선사업을 해나갔다.

1987년에는 울산, 원주, 경주, 청주, 성남YWCA로 확대돼 24개 지역YWCA가 노동부의 인정직업훈련소 인가를 받고 국가의 지원과 후원으로 저소득 계층을 위한 사업을 위탁받아 그 실적을 쌓았다.

 

YWCA의 무료직업안내소 설립은 여성의 자활능력을 개발하여 경제생활 및 지위를 향상시키고 여성의 고용기회를 증가시켰다. 특히 유휴 노동력을 활용, 모든 연령층에게 건전한 일자리를 안내해 직업소개를 구실로 행해지는 인신매매를 예방하는데 기여했다.

시범탁아소 개소식

시범탁아소 개소식

▲ 근로여성을 위한 시범탁아소 운영

1980년대로 들어오면서 생산직에 참여하는 여성취업 인구가 늘어나고 여성들은 결혼 후에도 사회활동을 계속하려는 의지가 강해졌다. 그러나 남편과 똑같이 직장을 갖고 있어도 여성은 육아, 가사노동 등 3중고에 시달려야 했다. 이들 자녀를 위한 탁아시설은 수요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고 비록 아이를 맡길 곳이 있어도 수입에 비해 과도한 지출이 요구돼 저소득층 근로여성에겐 부담만 가중되었다. 서울시가 운영하는 어린이집은 수탁시간이 오전 9시~오후 5시까지이며 더군다나 동사무소의 추천을 받을 수 있는 영세민 가정만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직장을 가진 부모가 이용하기에는 불편한 점이 많았다. 국가차원에서도 숙련된 기능 인력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기혼여성을 위한 탁아문제를 선결하는 일이 가장 시급했다.

서울YWCA는 1977년 독산동에 설립한 근로여성회관에 아가방을 열었다. 서울YWCA의 아가방은 일반 유아원이나 서울시가 운영하는 어린이집과는 달리 수탁시간을 늘리고 아동의 연령도 2세~7세로 높였다. 수탁시간은 오전 8시~오후 8시까지 12시간동안 아기를 맡아주기 때문에 여성들이 퇴근 후 아기를 데려갈 수 있었다. 또 시장이나 볼일을 보러 나가는 주부들을 위해 시간단위로 아기를 맡아주는 등 이용범위를 넓혔다.

초창기 YWCA탁아소는 주로 영세민 자녀를 위한 봉사차원에서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것이 인천YWCA의 만석동 놀이방과 공부방이다.

탁아소사업은 1980년대 전반까지 지역YWCA마다 개별적으로 운영돼 오다가 1985년 이후 탁아운동을 위한 연합체가 조직되고 기독교내에 탁아문제 공동대책위원회가 구성된 후 공동연대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정부가 탁아소운영을 지원하면서 여성들이 마음 놓고 일할 수 있는 지역 탁아사업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되었다. 1987년 12월 4일 국회에서 통과된 남녀고용평등법에서는 근로여성의 복지증진에 관한 기본계획을 수립하게 하였다. 이 기본계획에 의해 200명 이상의 근로여성을 고용하고 있는 사업장에는 직장탁아소 설치가 의무화 되었다. 따라서 노동부는 공업단지 및 여성근로자 밀집지역에 시범탁아소를 설치하기로 하고 탁아사업에 꾸준히 경험을 쌓아온 YWCA 등 민간단체에게 이를 맡겨 운영하도록 했다. 노동부가 지원하는 시범탁아소 사업은 YWCA가 부지를 마련하고 노동부가 탁아소 건물을 제공하면서 YWCA가 운영하는 조건이었다. YWCA연합회는 재정부족으로 시설을 확장하지 못하고 있던 각 지역YWCA에 탁아소를 운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탁아소 사업은 1988년부터 노동부의 지원으로 정식 출범하였고 1987년~1991년까지 5년간 매년 2개의 탁아소를 건립, 총 10개의 탁아소 중 6개의 탁아소 운영을 YWCA에 의뢰했다.

1980년대 놀이방과 공부방으로 시작한 인천YWCA는 1988년 11월에 인천시 북구 작전동에 시범탁아소를 건립하였고 1989년 1월에 성남YWCA가 시범탁아소를 개원하였다. 이를 계기로 1988년 4월에 부산YWCA, 11월에 마산YWCA가 개원했고 1989년에는 광주, 전주 등에 이어 군산, 서울, 원주, 목포, 강릉, 거제, 대구, 서귀포, 안산, 안양, 의정부, 제주, 조치원, 진주, 창원, 청주, 춘천, 인천 선학, 인천 삼산, 서울 봉천, 서울 가락, 광명과 고양 각각 2개 지역YWCA가 시범탁아소를 개설했다. 이 사업은 근로여성들에게 안정되게 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8년에 열린 30회 YWCA 전국대회 이후 시범탁아소는 31개 지역YWCA에서 16개 지역YWCA가 더 확장돼 47개 지역에서 시범탁아소를 운영하였다. 그 후 1989년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의 탁아시설 설치, 운영규정에 따라 보건사회부가 인정하는 기관에서만 탁아모 훈련을 할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되어 YWCA가 운영하던 시범탁아소도 소관부처가 보건사회부로 이관되었다. 근로여성들에게 대단한 환영을 받았던 이 탁아소는 1991년 8월 1일 대통령령에 의해 제정된 영유아법에 따라‘어린이집’으로 명칭이 바뀌게 되었고 당시 보건사회부의 지원을 받아 30곳에서 어린이집을 운영했다. 근로여성을 위해 시작된 시범탁아소의 운영이 오늘의 YWCA어린이집 운영으로 이어진 것이다.

 

▲ 가사노동자 보호를 위한 괜찮은 일자리 마련과 가사노동자 고용 개선 위해 노력 중

2008년 한국YWCA는 보건사회부가 사회서비스 분야에서의 괜찮은 일자리 창출과 사회서비스 산업의 경쟁력 제고를 달성하기 위해 실시한 사회서비스 선도사업에 참여했다. 이 사업 참여를 통해 한국YWCA는 약 50여만명에 이르는 돌봄종사자들에 대한 인식 제고는 물론 직업인으로서의 자긍심을 고취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또한 YWCA 도우미 서비스를 ‘돌봄과 살림’이라는 브랜드로 체계화시킴은 물론, 교육체계 및 교재개발, 표준업무 매뉴얼 및 서비스 제공시스템 체계화 등의 통합관리시스템을 정비하였다.

2010년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YWCA는 가사노동자 고용개선법 제정을 위해 노력 중이다. 가사직종이 개발된지 수십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약 50여만명에 이르는 가사노동자들이 근로기준법의 보호는 물론 그 어떠한 사회제도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일용, 일당직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 1970년대부터 시작된 ‘동일노동 동일임금’ 운동, 여전히 진행 중

1970년대 남성영역이라 치부되던 직종의 진입장벽을 깨고 여성들을 훈련시켜 일하게 함으로써 여성노동의 가치를 제고시키는데 노력했던 한국YWCA가 50여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현저한 차이를 보이는 남녀임금격차 해소를 위한 인식개선을 위해 활동 중이다.

저출산 고령화에 따라 여성을 노동시장에 유인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펼치는 상황인데, 정작 노동시장에서 나타난 성별 임금격차는 34.1%로써 OECD 회원국 가운데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남성이 100만원을 받을 때, 여성은 66만원을 받고 있는데, 여성이 남성이 1년 일한 임금과 같은 임금을 받기 위해서는 1년을 일하고도 추가로 84일을 더 일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2020년 기준).

여성의 임금불평등 문제는 여성과 남성이 동일한 가치의 노동을 수행함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임금을 받지 못하는 근거 없는 차별에서 비롯된 부분과, 직종 차별이나 경력단절, 저임금 및 불안정한 비정규직 노동 등 노동시장에서의 다양한 불평등 요소들의 종합적 결과이므로 이에 상응하는 종합적 접근이 필요하고, 심각한 임금격차 수치에 비해 개선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미약하므로 인식을 제고할 방안 또한 모색되어야 한다. 이러한 한국YWCA의 활동은 2013년 3월 21일 국회의장 여성아동미래비전자문위원회 제5차 회의 (주제 : 여성과 경제활동)에서 ‘동일임금의 날’ 제정이 제안됨으로써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동일임금의 날’ 제정은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지원에 관한 법률」을 개정, 매년 5월 넷째 주 고용평등주간의 월요일로 정할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YWCA는 ‘동일일금의 날 제정’을 위해 캠페인과 토론회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정책과 제도를 정비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동일임금 교육_자료집(최종)

동일임금 교육_자료집(최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