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차경애(한국YWCA연합회 명예연합위원), 배정미(한국YWCA연합회 실무활동가)

1922년 일제치하의 어려움 속에서 창립된 한국YWCA연합회는 종속적이고 피동적이던 여성들이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창립초기부터 다양한 직업훈련을 통한 경제적 자립을 지원해 왔다. 전통적으로 여성에게만 부과되고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던 돌봄노동을 새로운 여성 직종으로 개발하는데 앞장서는가 하면 남성의 전유물로 여기던 직종에 여성을 훈련시켜 여성들의 직업영역을 확장시키고 어느 직종에서나 평등하게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데도 주도적으로 앞장서왔다.

한국YWCA 역사는 여성의 직업훈련과 직종개발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YWCA에서는 사회변화에 따라 필요한 직업훈련을 해왔다.

직업은 인권의 한 부분이다. 직업을 가짐으로써 인간은 성인으로서 독립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직업은 경제적 독립과 의식적 자립을 통해 부모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성인으로서 본격적인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가는데 결정적인 요소이다. 따라서 여성에게 직업은 피보호자, 의존적 존재에서 독립적인 성인으로 성장하는 기회의 획득을 의미한다.

 

창립 초기부터 시작된 직업훈련

한국YWCA연합회에서는 여성들이 독립된 인간으로 살아가며 자아의식을 갖게 하기 위해 초창기부터 직업기술 교육과 생활기술교육을 실시했다. 1920년대는 사회전반에 걸쳐 계몽주의가 성행하고 교회, 사회단체들이 야학을 설치해 여성의 지위향상과 생활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시기였다. 경성YWCA(현 서울YWCA)도 1924년 2월 부녀자 문맹퇴치를 위한 여자노동 야학교를 설립했다. 각 지방 지역YWCA에서도 사회적으로 전혀 보호 받지 못하고 있는 근로부녀자들을 대상으로 교육사업과 함께 회원들이 다니는 공장실태를 조사하여 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정신적인 지도를 해갔다.

경성YWCA는 창립초기부터 계속 사업으로 해오던 양재강습과 양복실습반을 통합해 1925년 기청양재여숙(基靑洋裁女塾)으로 설립허가를 받아 여성들의 기술직업훈련을 시작했다. 또한 1934년 서대문에 조그마한 회관을 마련하자 이 회관에서 봄, 가을에 중국요리, 서양요리, 조화, 인형 만들기, 양재와 편물강습을 번갈아 실시했다.

최용신과 부산 동래농예원을 통한 농촌여성 훈련

한국YWCA연합회는 1932년 최용신 간사를 수원 샘골로 파견해 농사의 개량과 협동정신을 키워줌으로써 농민들의 경제상태를 향상시키는 일을 하였다. 최용신은 1932년 5월 강습소 인가를 받아 ‘샘골’이라는 뜻의 ‘천곡학원’을 설립하고, 18~40세의 농촌여성을 대상으로 마음의 계발, 가정관리, 생활조건 향상을 위한 일반적인 방법, 바느질, 요리법, 세탁법, 염색, 가정위생, 아동복지, 초등역사 및 지리, 오락놀이, 아동을 위한 동화와 동요 등을 가르쳤다. 최용신은 후에 심훈이 쓴 농촌계몽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으로 그려졌다.

일본의 탄압이 심해지자 일시적으로 활동을 중단했다가 해방 후 활동을 재개한 한국YWCA는 6.25동란으로 다시 부산으로 옮겨갔다. 부산에서는 1948년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로부터 한국선교회를 통해 기증받은 후 부산YWCA에서 농촌부녀자들을 위한 직업교육장으로 쓰던 동래농예원을 위임받아 양재, 타이프, 농예, 재봉, 축산, 원예, 수예, 편물, 가내수공업, 요리 등의 기술을 가르쳐 농업교육을 도우면서 농촌부녀자들을 위한 교육의 장을 열었다.

1952년 창립30주년을 맞은 YWCA 프로그램을 보면 동래농예원 직업기술훈련 참가자수가 35명, 부산⦁대구⦁대전⦁순천YWCA가 실시한 4개의 야학교는 242명, 서울⦁조치원등 2개 양재학원에 57명, 8개 영어반에 84명, 2개 성경반에 35명, 2개의 주간공민학교에 연 인원 500명, 서울에서 열린 2개의 강습반(독어, 타이프반)에 15명, 서울에 있었던 유치원에 75명이 참가하였다.

부산 동래농예원

부산 동래농예원

전후복구를 위한 기숙사생, 고아, 성매매 여성을 위한 직업교육

1947년 서울YWCA는 기청공민학교를 개설, 1949년부터 소녀과, 성년과, 보수과 등 3개 과로 나누어 연령과 학력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다 서울 환도 후 1952년 다시 문을 열었다. 이 공민학교에서는 정규과목 외에 주판 실기, 계절에 따른 보건위생 특별강좌를 실시하고 부업장려와 생활을 돕기 위한 아후강 뜨기, 조화, 수예 등의 기술교육을 병행해 가르쳤다. 학생들 중에는 30세 전후의 가정주부에서 70세 노인도 있었다.

1961년에는 직업여성을 위한 숙소와 직업알선 사업을 위해 한미재단과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 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의 원조로 서울 후암동에 ‘소녀의 집’을 열었다. 이들은 직장여성들인 관계로 낮에는 일을 하고 저녁에 꽃꽂이, 미용체조, 요리강습, 소창 등을 배웠고 일어회화반, 영어회화반을 조직해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1966년 서울YWCA는 봉천동 사업관에서 부녀자를 상대로 양재, 편물, 타자, 미용기술을 습득하게 하고 제품을 만들어 팔거나 직업을 갖게 해주었다.

광주YWCA는 1952년 전쟁고아들을 돌보기 위해 '사랑의 작은 둥지 성빈여사'를 개설했으며, 성빈여사의 원생 중 교육받지 못한 여자아이들을 위해 3년제 야간중학교 호남여숙을 설립했다. 1962년에는 보건사회부의 허가를 받아 성매매 여성들의 자활을 위한 ‘계명여사’를 설립하고 미용 등의 직업교육을 실시하였다.

소녀의 집 기숙사생이 빨래를 너는 모습

소녀의 집 기숙사생이 빨래를 너는 모습

‘시간제 가정부’ 교육훈련 시작: 돌봄운동의 지평 열다

1966년 서울YWCA는 가정주부들이 생계를 돕고 자립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가정 부업 장려’를 사업 중점으로 채택, 시간제 가정부 사업을 시작했다. ‘시간제 가정부’를 새로운 직종으로 개발, 지금의 도우미 알선 프로그램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우리나라의 주거환경이 주택에서 아파트로 바뀌고 소위 ‘식모’로 불리며 상주하던 여성이 출퇴근의 형식으로 달라지면서 시간제 가정부를 ‘파출부’로 명명했다. 어느 한 가정에 예속되어 지배당하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시간에 가서 정해진 일을 마치고 귀가하는 직업인의 개념으로 전환되었고, 가정주부들은 구하기 힘든 입주 가정부 대신 필요할 때마다 훈련된 인력을 공급받는 파출부제도를 크게 환영했다. 이들은 1주일의 훈련과정을 거쳐 점심을 제공받고 일을 했다. 외국 주재원 가정에서도 요청이 와 5주간의 훈련을 받고 외국인 가정부가 파출되었다. 한국YWCA에서는 통합적인 파출부 교육을 위해 파출부 교육교재를 발간하여 지역YWCA가 파출부 훈련교육에 활용할 수 있게 하고 청소법, 세탁법은 슬라이드로 만들어 실습할 수 있게 하였다.

파출부 알선사업이 좋은 반응을 얻자 1970년에 전주YWCA를 비롯, 1972년 대구YWCA, 1973년 춘천YWCA, 1974년 수원YWCA, 인천YWCA, 부산YWCA, 1975년에 대전YWCA, 1976년 광주YWCA, 1977년 마산YWCA, 군산YWCA가 차례로 이 사업을 시작했다. 파출부 사업을 시작한 지 10년만인 1977년에는 12개 지역YWCA가 실시할 정도로 파출부 사업은 YWCA의 중점사업이 되었다. 이 사업으로 부업을 갖게 된 인원은 1,164명. 이들과 사용자 모두가 YWCA회원으로 가입해 연간 회원 증가만도 4,424명에 달했다. YWCA연합회에서는 가정부 보호 캠페인의 일환으로 1973년 4월 15일~5월 15일까지 한 달간 가정부를 이용하는 가정주부와 가정부 양쪽의 의견을 토대로한 상호절충의 계기를 마련하는 ‘가정부 실태조사’를 실시했다. 이 조사를 통해 가정부에 대한 전문교육 프로그램의 필요성과 이미 여러 지역 YWCA가 실시하고 있는 시간제 가정부의 활용을 더욱 확대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파출부의 근무조건은 지역YWCA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 오전 9시~오후 7시까지 일하고 점심제공과 함께 시간당 1천원에서 1천3백원까지 받게 되었다. 이는 10년전 파출부사업을 시작할 때인 1966년 1일 3백원에 비해 4배 이상 늘어난 엄청난 액수였다.

1970년대 파출부 사업은 전국 26개 YWCA 중 23개 지역YWCA가 실시했으며 수요에 따라 외국인 가정에 파견하는 파출부, 환자돕는 이, 요리사 훈련을 개발하여 필요한 가정에 훈련생을 보냈다. YWCA의 파출부 사업은 사회경제적으로는 노동시장에서의 인력수급난에 봉착한 문제를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 여성의 돌봄노동에 대한 인식제고와 여성노동권 문제제기 차원에서 파출부를 하나의 직업으로 정착시켰다는데 큰 의의를 둘 수 있다.

성공적인 사업 수행의 결과로 YWCA는 노동부의 무료직업안내소 인가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활발했던 파출부 교육은 다른 여성단체의 강의개설 등의 영향으로 점차 줄어들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