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구정혜(한국YWCA연합회 실무활동가)

1922년 6월 22일 오후 2시, 전국 각 도(道) 회원 50인 이상의 여자단체 대표와 개인 참석자 60여명은 경성(京城) 협성여성경학원(協成女聖經學院)에서 조선에 YWCA를 조직할 것을 결의하는 발기총회를 열고 단체의 명칭은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기성회(朝鮮女子基督敎靑年會聯合會期成會)라 하고 임원을 선출하였다. 이것이 한국YWCA연합회의 시초이다.

일제 식민지 치하의 조선에 YWCA를 창설하고자 하는 첫 소망을 품은 이는 동경 유학 시절 YWCA의 사업을 경험한 김필례(金弼禮 1891~1983)였다. 1920년 12월 미국YWCA에서 파견된 위원들이 서울에 와서 재경(在京) 지도여성들을 만나 YWCA를 설립하고자 논의한 적도 있었으나 일본YWCA연맹의 지회로 설치되어야 하는 것에 대해서 조선의 여성들은 단호히 거부하여 성사되지 못했다. 김필례는 선교사들과 지도여성을 만나 조선 단독으로 YWCA를 설립하고자 의논하던 차에 김활란(金活蘭 1899~1970)과 유각경(兪珏卿 1891~1966) 등을 만나 뜻을 함께하게 되었다.

1922년 3월 27일, 남녀 유지 30명이 모인 가운데 임시회장 유각경의 사회로 제1회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 발기회가 열렸다. 이때 “여성사회가 암매(暗昧)한 가운데 생명의 활로를 알지 못하고 구금(拘禁)과 압박(壓迫)의 깊은 구렁에서 부르짖되 이를 구원할 만한 완전한 기관이 없음을 개탄하면서 세계 각국에 조직되어 일반 여성들이 각기 자기의 민족의 발전으로부터 전세계의 평화와 행복을 위하여 크게 활동하는 YWCA를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들은 조선에 있는 조선 여성 단체의 대표자를 청하여 여자 하령회(夏令會)를 개최하고 YWCA의 목적과 취지를 설명하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기관을 조직하기로 하고 준비에 착수했다. 4월 20일, 5월 4일 두 차례의 발기회의를 통해 교회 및 기독교단체 지도자에게 그 상황을 보고하면서 YWCA 필요성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고 지역 유지들에게서 기부금을 모으는 한편 전국의 여자전문학교와 여학생들을 모아 6월 12일부터 하령회를 개최하였고 마지막 날인 6월 22일 발기총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내었다.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 발기회의록_1922년 3월

<사진1.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 발기회의록_1922년 3월>

1차 하령회_1922년 6월

<사진2. 1차 하령회_1922년 6월>

YWCA 조직은 보통 지방의 조직이 먼저 생기고 그들이 연합하여 협의체인 연합회를 만들게 되어 있는데 조선YWCA는 연합기구가 먼저 설립되고 지역YWCA를 연합회 주도로 조직한 것이 특이점이다. 다른 나라와 달리 연합회가 먼저 창설되자 지방조직을 만들기 위해 김필례는 순회총무로서 40일 동안 마산, 부산, 대구, 청주, 선천, 평양, 진남포, 해주, 재령, 개성, 인천, 함흥, 원산, 목포, 경성, 광주 등 17곳을 순회하면서 각 지방과 여학생Y를 창설하고 연합회기성회에 가입하게 독려하였다.

1922년 사업보고_회원현황 내용

<회의록1. 1922년 사업보고_회원현황 내용>

초창기 활동에서 김활란은 주로 외국과의 교류 관련 활동을, 유각경은 조직의 운영을 담당하는 총무 역할을, 김필례는 순회총무로서의 임무를 띠고 전국을 순회하여 YWCA를 조직하는 일에 집중하였다.

1922년 당시 조선YWCA연합회에 가입된 지역Y는 광주, 서울에 이어 대구, 선천여자기독교청년회가 있었고, 1923년 원산, 평양, 안주여자기독교청년회 신규가입하여 지방 7곳과 개성의 호수돈, 원산의 신정, 대구의 신명, 부산의 일신, 경성의 이화, 정신, 배화, 협성여자성경학원, 및 원산 성경학원, 광주의 수피아, 개성의 미리암, 공주의 영명학교, 평양의 정의학교 등 13개 학교에 학생Y가 신규가입하여 회원 수가 전국 2,000여명에 이르렀다.

지역YWCA 조직으로 가장 먼저 결성된 광주YWCA는 연합회가 창설된 해 11월에 김필례의 주도로 양응도, 김합라, 임자혜 등에 의해 조직되었고, 가정주부를 위한 야학을 진행했다. 서울YWCA는 그보다 한 달 후인 12월 9일 유각경, 신의경, 최활란, 홍에스더 등에 의해 조직되었다. 창설 당시 서울YWCA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교육 프로그램과 계몽 프로그램이었다. 다음 해에는 대구YWCA가 조직되었는데, 연합회 회장 황에스더와 김활란에 의해 순회 창설된 곳이다.

빠른 시간 내에 지방조직을 갖춘 연합회는 1923년 8월에 열린 제2회 하령회에서 ‘연합회 기성회’의 명칭을 ‘조선여자기독교연합회’로 고치기로 결정하고, 연합회 헌장과 회원이 사용할 세칙(細則)을 통과시킴으로써 조직과 기구를 갖추게 되었다. 1924년 8월 25일에는 조선YWCA로 독립적으로 세계YWCA에 가입 인준을 받게 되어 한국 최초로 세계적인 여성운동체에 가입한 조직이 되었고, 이후 세계에 유례없는 빠른 전국 조직화와 사업운영에서 탁월한 결집력을 보여주었다.

1923년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 회록

<회의록2. 1923년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 회록 참석한 회원 현황>

1926년 말에는 9개 지방(광주·서울·청주·대구·선천·원산·평양·안주·함흥)에 지역YWCA가 조직되었고 15개 학교(이화·정신·호수돈·중앙유치사범학교·세브란스간호학교·배화여고·태화관학생 등)에서 학생Y를 조직했다, 당시 이사인 황애덕·김노다·유각경 등이 전국 큰 도시들을 순회하여 그 지방마다 뜻있는 기독교인·교육자들을 만나서 YWCA 조직을 적극 권유했고, 기독교 계통의 여자고등학교에 학생Y를 조직하도록 권유하기도 했다. 부산·전주·회령Y가 조직되어 38년 총회 때 대표를 보냈다는 연합회 기록이 있다. 그 당시 학생YWCA는 지역YWCA와 똑같은 조건으로 연합회에 직접 소속이 되었고 활동 내용도 지방 조직과 거의 같은 종류의 활동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초기에 설립되어 활동한 지역 조직들 중에서 광주, 서울, 대구Y를 제외하고는 한국사의 큰 변란 속에서 조직을 유지하지 못하고 기록만을 남기게 되었다.

중앙일보-YWCA60년(013)_YWCA조직

<기사1. 중앙일보, YWCA60년_YWCA 조직>

연합회는 매년 하령회와 총회(대회)를 열고 전국의 대표들이 모인 가운데 영성을 다지고 각 지역의 보고를 듣고 연구하며 토의하는 시간을 가졌다. 1930년부터는 2년에 한 번씩 열기로 하였고 1936년 제12회 하령회가 있은 후부터 점점 일제의 탄압이 심해짐으로 인해 1938년 대회에서 세계YWCA연맹에서 탈퇴하고 일본YWCA연맹에 가입하는 것을 결정하였다.

1938년 일본YWCA에 통합된 조선YWCA는 태평양전쟁이 본격적으로 개시되고부터는 더욱 어려운 상황에 접어들었다. 일어 사용을 강요하는 한편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기독교도 2천여명을 투옥하고 교회 2백여 개를 폐쇄하는 등 일제의 발악은 극도에 이르렀다. 이러한 탄압으로 학생YWCA와 지역YWCA 등 각 지방조직이 소멸되고 1940년 원산에서 개최된 제13회 하령회에는 경성, 선천, 원산, 함흥Y와 학생Y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다음 회의를 평양에서 하는 것으로 결정하였으나 개최되지 못한 채로 조선에서의 YWCA 운동은 휴지기에 들어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