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윤정란 위원(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 문화연구원 교수, 한국YWCA연합회 위원)

19세기 말 이후 한국 여성들은 남녀동등권을 주장하며 여성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사적인 가부장적 체제 속에 있던 여성들이 공적인 영역으로 점차 진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1910년 일제가 한국을 병합하면서 이전의 전통적인 여성관을 더욱 온존 및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일제는 문화적인 측면에서 정규 학교 교육과 열녀상과 같은 포상제도를 통해, 법제적인 측면에서는 호주 중심의 일제 가족법 이식을 통해 이를 강요하였다. 일제의 여성정책은 근대적인 여성이 아니라 식민지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상하복종관계 밖에 존재하지 않는 여성관을 더욱 강화시켰다.

이에 기독여성들은 병합 이전의 여성운동을 계승하여 가정에서 안주하는 것이 여성의 역할이 아니라 민족의 독립을 위해 남성과 똑같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절대독립론에 입각하여 여성운동을 전개하였다.

기독여성들은 사경회, 부흥회, 성경반, 기독 여학교 등에서 많은 여성들이 민족과 여성의 문제를 자각하게 만들었다. 3.1만세운동 직후 기독여성들은 대한민국애국부인회, 대한애국부인회, 대한국민회 부인향촌회 등을 조직하여 항일여성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기독여성들이 조직한 항일운동단체는 조직된 지 얼마 안 되어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어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었다. 이에 기독여성들은 1920년대 이후 민족과 여성들의 실력 양성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 이후 기독여성들은 한국민들이 일제에 식민지가 된 것은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들이 근대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여성들은 다음 세대의 양육자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이었다. 다음 세대의 국민 될 자녀들을 여성들이 제대로 양육한다면 한국의 부흥은 반드시 실현된다는 것이었다. 가정은 민족의 토대가 되는 만큼 가정에서 모든 일을 하고 있는 여성들이 배워야 그 민족의 장래는 밝다고 판단했다.

창립 발기인

<사진1. 창립발기인>

동아일보(19220329)-Y창립

<기사1. 동아일보, 19220329_Y 창립>

이와 같은 기독여성들의 인식 전환에 의해 출현한 것이 1922년 기독교 여성운동단체인 YWCA였다. YWCA는 치밀한 준비 끝에 창립되었다. 그 기간은 1년이 걸렸다. YWCA 창립은 1920년 12월부터 제안되었으나 당시는 여러 가지 조건이 성숙되지 않았다. 처음에 창립을 제안한 것은 미국 YWCA에서 보낸 미국위원단이었다. 미국에서 온 위원단은 정신여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겐소(John F. Genso) 자택으로 한국 기독여성 지도자들을 초대하여 YWCA의 이념과 조직 활동 등을 소개하여 창립을 권유했다. 그러나 현재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국이므로 일본 YWCA 지부로 창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한국 기독여성들은 미국 위원단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즉 한국의 독자적인 YWCA 창설만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로부터 한 달이 지난 1921년 초 YWCA 창립에 뜻을 두고 있던 김필례는 이화학당 당장 인 아펜젤라(A.R.Appenzeller)의 소개로 김활란을 만나 서로 의기투합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1922년 3월 27일 YWCA 창설에 뜻을 둔 신의경, 유각경 등 남녀 기독교계 지도층 인물들이 조선여자교육협회에서 모임을 가졌다. 이 날 창설 준비를 위해 임원을 선출하고 이후 사업을 결정하였다. 회장 유각경, 위원으로 김미리사, 김필례, 방신영, 김샬로메, 김경숙, 서기로는 이각경 등이 결정되었다.

매일신보(19220329)-북경세계기청대회대표참석-1

<기사2. 매일신보 19220329_북경세계기청대회 대표참석1>

매일신보(19220329)-북경세계기청대회대표참석-2

<기사3. 매일신보 19220329_북경세계기청대회 대표참석2>

김활란과 김필례는 사업의 진행을 배우기 위해 세계기독교 학생 청년회 총회에 참석하였다.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에게 김활란과 김필례는 조선 YWCA 창설에 대한 협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일본 YWCA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김필례는 일본 YWCA 총무 가와이 미치코를 만나 조선 YWCA 창설에 대한 협조를 구하여 마침내 일을 성사시켰다. 한국 YWCA는 김필례의 노력에 의해 탄생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설립자 김필례는 황해도 장연군 소래마을에서 출생하였으며, 평생 여성을 위한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연동연학교(현재 정신여자중고등학교)와 일본동경여자학원 중고등부를 졸업하고 미국 조지아주 액네스스칼 여자대학에서 학사, 뉴욕 콜롬비아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정신여학교 교사와 교감, 광주 수피아여학교 교감으로 재직하였고 광복 이후에 수피아여자중학교 교장과 정신여자중학교 교장 및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이와 같이 평생을 여성 중등교육에 헌신한 인물이었다. 그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늘 주장하였고, 그것을 실천에 옮겼다. YWCA도 민족의 독립과 여성의 지위향상을 위한 목적 하에서 설립되었다. 그래서 김필례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YWCA 창립과 발전을 위해 헌신하였던 것이다.

1922년 4월 20일 서울 이화학당에서 2차 발기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YWCA 창설을 위해 청년회 여자 하령회를 개최하자는 의견이 나왔으며, 이에 임원으로 김활란, 부회장 방신영, 총무 김필례 등이 결정되었다. 5월 4일 3차 발기회를 가진 후 6월 13일 하령회를 일주일간 개최하였다. 이날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기성회가 발족되었다. 회장으로는 방신영, 부회장 홍애시덕, 총무 김필례, 서기 김합라, 신의경, 재정위원으로 유각경, 박양빈, 김양라미, 박용애, 규칙제정위원 김활란, 김필례, 마제시, 김보원, 신의경 등이었다. 총무 김필례는 지역 여자청년회가 YWCA에 가입할 수 있도록 각지 순회강연을 시작하였다. 1922년 11월 5일부터 12월 14일까지 거의 40일 동안 진주, 마산, 대구, 청주, 선천, 평양, 진남포, 해주, 재령, 안악, 개성, 인천, 함흥, 원산, 목포, 광주 등 17개 지역을 방문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1922년 사업보고_지방순회 내용

<회의록1. 1922년 사업보고_지방순회 내용>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기성회는 1년 동안 각 지역을 순회하며 YWCA 지부 가입을 권유, 세계 YWCA 인물들의 초청강연, 지방에서 올라오는 여학생들의 기숙사 제공 등의 활동을 벌였다. 당시 총 7개 도시와 16개 학교에서 지부로 가입하였다.

YWCA 활동은 하령회, 수양회, 강연회 등을 통해 이루어졌다. 하령회는 1주간의 훈련과 교육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도 시간과 지도자에 의해 인도되는 성경공부 등의 종교적 프로그램과 저명 인사들의 강의를 통한 교육과정 및 총회와 운동, 사교 등으로 이루어졌다. 하령회에는 각 지방 기독 여자청년회, 학생 YWCA 대표, 기타 단체 및 개인들이 참가했으며, 이 기간 동안 총회도 개최되었다.

하령회 이외에 수양회와 강연회를 수시로 개최하였다. 이러한 수양회와 강연회를 통해 일반 여성들의 정치사회 의식을 고취시켰다. 이와 같은 하령회, 수양회, 그리고 강연회 등을 통해 YWCA가 목적으로 한 것은 첫째, 여성의식 개혁을 위한 문맹퇴치운동이었다. 다시 여성들은 교육을 받을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문맹자가 많았다. 이러한 여성들의 문맹으로 민족과 국가의 발전이 저해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문맹퇴치가 어떤 일보다 급선무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인식 하에 YWCA는 야학과 각종 강습소를 설치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하령회와 총회에서 총괄 지도했다. 야학에서 주로 가르친 과목은 한글, 산수, 음악, 성경 등의 기초과목이었다. 이외에 영어와 편물을 가르쳤다. 1928년대 중반 이후 YWCA의 문맹퇴치운동은 도시 중심에서 농촌으로 확대되어갔다.

둘째는 여성권위회복을 위한 축첩, 조혼금지, 그리고 공창폐지운동이었다. 이 문제는 하령회를 개최할 때마다 항상 중요한 안건으로 제시되었고 강연을 통해 계몽활동을 벌였다. 1925년에는 이와 같은 문제를 다루기 위해 사회문제연구부를 신설하였다. 셋째는 위생법, 육아법, 요리강습, 간편한 의상과 우의 연구 등에 대한 여성생활개선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은 주로 강습과 강연을 통해 이루어졌다.

YWCA는 이와 같은 운동 이외에 민족운동에도 연대하며 활동하였다. 1920년대 초반에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물산장려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물산장려운동은 “철저히 자급자족을 실행하고, 일보 나아가 상공업에 착수하여 직접적으로 실업계의 진흥을 꾀하고 간접으로 사회의 발전과 진보를 기한다”는 것이 목적이었다. 즉 경제적 실력양성운동이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금주, 금연운동을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와 연대해서 전개하였다.

1928년 6차 정기총회와 제2차 남녀하령회에서 YWCA는 농촌계몽운동에 대한 안건을 채택하고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섰다. 정기총회에서 채택된 안건은 여성들에게 부업을 어떻게 장려시킬 것인가라는 것이었다. 이는 여성의 부업 즉 양잠, 직조, 고용인, 양돈 등의 구체적인 방법에 대한 관심이었다. 1929년 제7회 정기총회에서 YWCA는 농촌부를 신설하였고 농촌계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29년부터 1934년까지 조선YWCA연합회 농촌부 간사 겸 연합위원으로 활동한 황애덕은 농촌계몽운동의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였고 제자 최용신과 김노득을 YWCA 농촌사업 담당자로 지역에 파견하여 적극적인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최용신은 널리 알려진 소설 상록수의 실제 모델이었다. 이때 YWCA 농촌사업의 주요과제는 피폐하기 이를 데 없던 식민지 농촌 민중들의 생활을 향상시키고 농촌여성들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한 농민교육, 농촌보건위생, 농민협동조합, 농촌부업 장려 등 이었다. YWCA에서는 농촌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농촌여성지도자가 양성되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YWCA에서는 1934년 농촌부녀지도자양성소를 설립하였다. 이 양성소는 2회에 걸쳐 실시되었다. 양성소에 입소할 수 있는 자격은 18세 이상 40세 이하의 한글을 읽고 쓸 수 있는 농촌에 사는 여성으로 제한하였다. 교육기간은 약 한 달이었으며, 모두 기숙사에서 생활하였다. 그리고 교육을 마치더라도 지방청년회와 YWCA연합회와의 긴밀한 관계를 가지도록 하였다. 이는 한 달 동안 모든 교육을 마칠 수 없다는 현실적인 인식하에서 나온 방안이었다. 교육 내용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가정상식, 요리, 재봉, 세탁, 육아, 가정위생, 가정부기, 역사, 지리, 동요, 동화, 유희, 가정 부업 등이었다. YWCA는 다른 기독교 단체와 연합하여 적극적으로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YWCA의 농촌계몽운동은 1930년대 중반 이후 일제의 방해로 더 이상 전개되지 못하였다.

YWCA는 기독교 복음화를 전면에 내걸고 여성운동과 민족운동에 앞장섰지만 일본의 일본YWCA와의 통폐합 강요로 1938년 7월 15일 세계YWCA를 탈퇴하고 일본YWCA와의 통합 결정을 내렸다. 일본Y의 조선지부로 조선여성들을 위한 활동을 진행하였으나 이후에도 일제의 탄압은 더욱 심화되어 1941년 결국 활동은 중단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강점기 YWCA가 기독교 복음화를 내걸면서 추구했던 여성운동과 민족운동은 1945년 광복 이후 재건된 YWCA 활동의 근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