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최만자(한국YWCA연합회 위원)

1. 사회와 가정에서 억압받는 여성들의 해방을 위하여 시대에 맞선 YWCA

1) 1922년 Y가 창립된 시대에는 여성 억압적 가부장적 가족 질서 속에서 여성들이 교육도 못받고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삶의 의미를 찾기 어려웠다. 생활 근저에 파고든 악습과 폐단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문맹, 조혼, 공창제도, 축첩제도 등이 특히 여성들을 힘들게 하였다. 이런 시대 속에서 조선YWCA는 여성들의 계몽과 지위향상,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여성 야학을 시작하여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교육, 토론회 등을 통하여 남녀평등사상을 고취하는 활동을 지속적으로 진행하였다.

2) 무엇보다 여성인권 확립을 위하여 조혼제도 폐지, 공창제 폐지 운동, 축첩반대 운동 등을 전개하였는데, 당시 사회에서 성행하던 조혼제도는 ‘민며느리 제도’로 10세 안팎의 여아들을 시댁에 들여 종에 가까울 정도로 노동력을 착취하여 시댁의 경제를 책임지게 하는 것이었다. 이런 조혼제도를 일컬어 집안에 ‘소 한 마리를 사들이는 노동력’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04년 10월 일제가 들여온 ‘경성영사관령’ 제3호인 매춘업은 조선여성의 인권과 성의 유린이라는 이중적 착취를 가져왔으며 이에 대한 거부로 공창제 폐지운동을 Y가 앞장서서 주장하였다. 그리고 여자는 한 번 결혼하면 이혼이나 재가는 용납되지 않아 평생 과부로 늙어가야 했지만 남자는 재취, 삼취에다 첩까지 거느려도 당연시 되었다. 이렇듯 남녀차별이 극심하고 여성이 억압된 시대 속에서 Y는 여성들의 지위향상과 여성인권확립, 남녀평등을 이루기 위해 시대에 맞서는 다양한 활동들을 전개하였다.

 

 

2. 평등한 법적 지위 확보를 위한 포기하지 않은 투쟁

1) 가족법 개정운동

1953년 부산 피난지로부터 서울 환도 후 당시 한국 최초의 여판사인 이태영을 연합회 이사로 선출하면서 가족법 개정을 위한 법률 초안 마련 작업을 하였다. 그것은 당시의 민법이 결혼, 친권, 상속 등에 관련된 여성의 법적 지위가 조선시대 관습법에 머물고 있어 이를 탈피하여 평등한 지위를 반영하는 신민법을 제정코자 함이었다. 이에 8개 여성단체가 연합하여 ‘여성단체의 민법(특히 친족상속법) 제정에 관한 건의서’를 제출하였다.

그 요지는 ①호주권 관계 ②혼인관계 ③친권문제 ④양자문제 ⑤호주상속인의 순위문제 ⑥재산상속문제 ⑦유류분문제 등에 관해 남녀평등을 이념으로 하는 헌법정신에 비추어 종래 누습을 타파하기 위해 건의한 것이다. 더 나아가 부부별산제도, 불분명한 재산 부부 공유제, 이혼 자유 확보와 이혼 후 생활 보장 위해 이혼 시 재산분여 청구권 요구 등을 주장하였다. 이태영은 ‘여성과 친족상속법’이란 소책자를 1957년 3월에 발간해 계몽활동도 전개하였다. 이는 민주화와 남녀 평등화를 요구하여 법률상 여권신장을 획득하고자 한 노력이었다.

가족법 개정 운동은 지속되었다. 강연회, 좌담회, 진정서 제출 등 다양한 노력으로 1963년 10월에 가정법원이 설치되었고 1970년대 와서 다시 Y는 범여성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마침 1975년 유엔의 ‘세계여성의 해’ 선포로 ‘여성차별철폐협약’의 영향을 받아 운동은 확산되었다.

‘범여성 가족법개정 촉진회’를 결성, 평등한 위치에서 사랑과 이해, 존경과 신뢰를 받는 가족관계 유지를 위해 제도적 보장을 요구한다는 선언문을 채택하였다. 1975년을 ‘가족법개정의 해’로 정하고 1만장의 편지를 국회의원들에게 보내는 운동을 펼쳤다. 가두시위, 지방별 기념강연, 촌극경연 개최 등 활동을 통해 국회 통과를 요구하였다. 이 운동은 여성들 힘으로 여성인권을 회복하는 운동이었고 이를 여론화시켰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1980년 이후 90년대에 이르러 각종 여성관련 법 개정에 앞장서 운동을 벌일 수 있었던 그루터기가 된 것이다.

1977년 가족법이 일부 개정되었지만 미흡한 점이 많아 1981년 가족법 개정 위한 전국 서명운동을 다시 전개하였다. 14개 회원 와이 3천여명이 서명했고 28회 전국대회(1982년)에서 총선 당시 각 정당이 가족법 개정을 공약한 사실을 상기시키고 그 해 9월 정기국회에 현행 가족법을 사회성장 저해 요인의 하나로 적시하여 반드시 상정되기를 촉구하는 가족법개정 촉구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가족법애서 첫째가 호주제도는 폐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남녀차별에서 친족의 범위를 정한 것은 고쳐져야 한다. 친족 범위 내의 혼인, 즉 근친혼만을 금지하는 것이 타당하다. 동성동본으로 촌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들끼리의 혼인을 금지하는 현생 가족법은 고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2000년 10월 호주제 폐지 위한 시민연대에 동참했고 드디어 2005년 폐지되었다.

2) 혼인신고 운동

대한YWCA연합회 사회문제부의 포스터

대한YWCA연합회 사회문제부의 포스터

지금은 혼인신고가 당연하다. 그러나 1950년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여성들이 혼인신고를 하지 않음으로 인해 수많은 불이익과 생활의 고통을 당하는 현실을 보면서 Y는 남녀가 함께 바르게 그리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행복하게 살아가자는 취지에서 혼인신고운동을 전개하였다. 1958년 제20회 전국대회에서 ‘혼인신고 강조운동’을 중점사업으로 채택했다. ‘혼인 신고를 하자’는 슬로건 아래 혼인신고의 중요성과 법적 효력의 유익을 계몽, 교육하기 위해 강연, 좌담회를 지속적으로 열고 만화, 포스터를 제작하여 전국에 배포하였다. 소책자를 만들어 홍보하고 가두 캠페인을 벌이는 등 대대적이고 적극적인 혼인신고 독려운동을 벌였다. ‘혼인신고하라!’는 포스터는 박에스더의 영문 뉴스레터를 통해 세계Y와 유엔 여성지위위원회에도 보고되었다. 또한 축첩반대 운동도 적극 전개하였다. 당시 남자들의 축첩은 암묵적으로 용인되어 있는 문화였다. 특히 공무원, 국회의원들 중에서 첩을 두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확인하고 각 여성단체와 교회에 통고하여 ‘축첩자를 뽑지 말자’는 강연과 시위를 계획했고 1960년 7월 19일 명동에서 계몽강연과 데모를 진행하였다. 이러한 활동 이후 공무원 사회에서 여자문제에 대한 잡음이 사라지게 되었고 여성지위향상과 남녀평등문제의 심각성을 어느 정도 사회에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Y는 기독교 복음에 근거하여 남녀의 차별이 없고 모든 인간은 존엄하며 ‘신의 자녀로서 여자도 남자와 똑같은 존재’임을 선포하였다. 남녀평등을 이루기 위해 교육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주장하고 비윤리적 폐습을 폐지해야 할 것을 강조했다. 곳곳을 순회하며 강연하였고 여성들이 자각하여 남성에게 예속되는 삶으로부터 벗어나 평등한 권리를 누려야 함을 역설하였다.